퇴직 후 처음 발을 들인 조용한 공간에서 느낀 낯선 설렘
퇴직 후의 일상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흘러갔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는 일조차 그전과는 다른 감정으로 다가왔다.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시간은 차분했고, 처음에는 그런 여유가 마냥 좋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마음 한쪽이 허전해졌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편안함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느낌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여행을 가거나 취미를 찾으라고 했지만, 나는 몸도 마음도 그다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무작정 집에서 도보로 십 분 거리의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단지 그곳이 조용하고 따뜻할 것 같았고, 나 혼자라도 불편하지 않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큼 안도감을 느꼈다. 책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나지막한 발소리들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사람들이 제각각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아보는 모습은 조용한 활기였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고요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 또한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그날 나는 특별한 책을 고르지도 않았고, 긴 시간 머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방문은 내 마음속에 어떤 씨앗 하나를 남겼다. 퇴직 후에도 내가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고, 다음 날 나는 다시 도서관에 갔다.
그렇게 도서관은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방에 필기도구 하나 넣은 채 도서관으로 향하는 일이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공부는 그렇게, 특별한 각오도 계획도 없이 시작되었다. 그냥 도서관 문을 연 그날부터였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책장에서 눈에 띈 한 권의 책을 펼쳤다. 제목은 낯설었고 내용도 전공과 무관한 철학에 가까운 주제였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빠져들어 있었다. 나는 왜 이런 걸 지금에서야 읽게 되었을까. 회사 다닐 때는 일과 사람 사이에 치여서 책을 읽을 여유도, 공부를 다시 시작할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성과를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읽고 싶은 것을 읽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해보기 시작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니 세상이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뉴스에서 스쳐 지나가던 단어들도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흘려들었던 사람들의 말 속에도 의미가 숨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사소한 풍경조차도 책에서 읽은 구절과 연결되며 내 머릿속에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조금씩 공부의 연장선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었기에 더 즐거웠다.
처음에는 철학 책 몇 권으로 시작했지만, 곧 역사서도 읽기 시작했고, 관심이 넓어지면서 미술과 건축에도 손을 댔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메모를 하면서 다음에 다시 읽기도 했고, 관련된 강의를 찾아 들으면서 내용을 보완해 나갔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쌓여가는 지식은 숫자나 스펙이 아니라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확장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공부가, 이제는 내게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전 같으면 피곤하고 귀찮게 느껴졌을 학습이 이제는 기다려지는 일이 되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얼마나 배우고 있는지가 내 일상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공부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퇴직 후 비로소 찾은 나만의 공부방, 도서관이라는 마법 같은 장소
퇴직 전에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 늘 고민했다. 직장 안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보며 적당한 말과 행동을 해야 했고, 가정에서는 가장이라는 책임 속에서 늘 중심을 잡아야 했다. 그런 삶은 틀에 맞춰진 안정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잃게 만드는 무게이기도 했다. 그런데 퇴직 후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그런 역할에서 벗어난 나에게 처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허락된 자리였다. 누구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나 역시 누구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는 공간. 책상 하나, 조용한 조명 아래 펼쳐진 책 한 권, 그리고 나 혼자만의 시간. 그것이 도서관에서 내가 만난 작은 마법이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내게 있어 사유의 공간이었고, 감정을 정리하는 공간이었으며, 내가 누구인지 다시 돌아보는 내면의 거울 같은 공간이었다. 종종 같은 시간대에 마주치는 이웃들도 있었지만,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저 익숙한 존재로 눈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날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두꺼운 세계사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하는 옆자리에서 괜히 나도 자세를 고쳐 앉기도 했다.
그 공간은 공부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결코 경쟁이나 비교가 없는 곳이었다. 오히려 각자가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이유로 책과 마주하는 그 조용한 연대감이 나를 깊이 위로했다.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었다. 몰랐던 세상, 몰랐던 감정, 몰랐던 나 자신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특별한 것은 그 안에서의 시간이 더디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직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삶을 얻은 것이라는 감각. 그것이 내가 도서관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공부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출발점이 되어준 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앞으로도 나의 일상 속에서 변함없는 공부방이 되어줄 것이다.